늘 꿈구는 사람 늘 혼쏟는 匠人 김윤오씨


‘그윽한 풍경소리가 산사(山寺)에 울려퍼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두 눈에 쏟아질 듯 하다. 깊은 산중에 이렇게 아름다운 절이 있었다니…. 한밤의 고요와 평안이 몸을 휘감았다. 그때였다. 백·황·적·녹·청의 오색 빛을 띤 뱀이 다리 아래에서 슬슬 몸을 감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눈 깜짝할 새에 얼굴까지 올라온 뱀은 목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숨통은 점점 죄어오고 몸은 부르르 떨린다. 숨막히는 공포!’

꿈이었다. 김윤오씨(49)의 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다. 사지가 늘어져 일어나기가 쉽지 않아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에게 ‘단청’은 천형(天刑)이다. 벌써 10년째. 씻지도 않고, 밥도 거르면서 ‘단청’ 문양에만 매달려 온 세월이었다. 남들은 그에게 ‘미친 사람’이니 하면서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하기는 그간 얻은 것이라곤 병뿐인지 모른다. 몸무게는 겨우 45㎏, 영양실조로 앞니는 몽땅 날아갔다. 8만4천개도 더 되는 단청 금문양을 창작했으면 이만 되지 않았나. 좀 쉬고 싶다. 그러나 이렇게 선잠에서 깨고 나면 영락없이 다시 연필을 잡아야 한다. 눈에 스쳤던 뱀의 문양이 또하나의 새로운 ‘단청’임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꿈을 자주 꾼다. 지금은 기억이 몽롱한 유년시절에도 그랬다. 열살인가 열한살인가 되던 어느날 아침에도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자 밖에서 숨죽인 곡성이 들려왔다. 흰옷에 산발을 한 어머니는 꿈에서 놀라 울음을 터트리는 그를 쓸어안고 혼절하듯 쓰러져버렸다.

‘아버지는 왜 죽었는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음이란 테마는 젊은날의 그를 끈질기게 괴롭혀온 화두였다. 사춘기를 홍역처럼 앓던 고등학생 무렵, 그는 아무 말 없이 짐을 쌌다. 속세를 버릴 결심을 굳혔다. 먼 친척뻘 되는 한석성(韓奭成) 선생이 단청 분야에서 꽤 인정받는 분으로 불국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절에서 무슨 공부든 하면서 자연스레 승가(僧家)의 한식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느냐” “전문적인 미술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몇 년은 배워야 한다. 쉽게 생각했으면 아예 할 생각을 마라”

그뿐이었다. 그 뒤 그는 몇 안되는 문하생들 사이에서 ‘꼬마’ 생활을 해야 했다. 스승은 단청기술을 가르쳐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일만 부려먹는 터였다. “선자리에서 성불(成佛)할 수 없고, 맨손으로는 용을 잡을 수가 없다. 오직 많이 그려보고 연습한 연후에라야만 ‘도’를 얻을 수 있다”는 스승의 말을 곱씹으며 눈을 치뜨고 어깨너머로 단청작업을 배워나갔다. 고된 훈련이 계속된 지 8년 만인 1979년 문화재수리기술자(단청) 면허를 땄다.

조급한 성취감에 빠진 탓일까. 그는 승가에 뼈를 묻겠다는 결심을 접고 스승 문하에서 벗어났다. 돈을 벌고 평범함을 유지하기 위한 생활. 삶은 어느새 그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 뒤 몇 년간 그에게는 성공적인 삶이 펼쳐졌다. 석굴암, 천마총, 무열왕릉, 김유신사당 등 경주에 있는 문화재에 그의 손때가 묻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백담사, 오세암, 월정사 등 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고 그를 불렀고 돈을 벌어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호기는 치솟았다. 결혼도 했고, 딸·아들도 낳았다. 세속적으로 따지면 ‘남 부러울 것 없는’ 생활…. 색이 바랜 단청 문양을 복원하거나 기존에 있는 300여가지의 단청 문양을 그려넣는 것은 ‘기술자’로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늘 ‘창작’에 대한 무거운 짐이 마음 한구석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자유인가, 속박인가. 겉으로는 편한 듯하면서도 속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혈기 왕성하던 그의 젊음이 사라지던 40대 초. 그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때가 온 것을 느꼈다. 더이상 미룰 수 없었다.

1992년.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10여평 남짓한 지하셋방에서 찌그러진 밥상 하나 올려놓았던 게 시작이었다. 두문불출, 식사는 하루 한끼 이상 하지 않았다. ‘무아(無我)의 세계’에 빠진 듯한 그를 보고 사람들은 ‘미쳤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평생을 따라다닌 ‘죽음’이라는 화두 대신 ‘삶’이라는 화두를 택하고 주위 사람들을 위해 ‘원(願)’을 세우고 있었다. 새로운 단청 문양을 만들어 내고 그림 아래에는 하루하루 일기를 써 놓았다. 어느날에는 ‘전통의 세계화’를 원으로 세웠고, 또 어떤 날에는 매일 부부싸움을 하는 ‘옆집의 평화’를 원으로 세웠다.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가 창작한 수만가지의 단청문양은 그동안 더 빠그라진 밥상 옆에 켜켜이 쌓여 있다. “문화재청에 등록을 해서 단청문양을 보존하거나 박물관이라도 건립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리도 들리고, 친지들은 문화재청 전문위원이나 그의 스승 한석성 선생으로부터 인증서도 받아놓은 상태다.

그러나 김씨는 할 말이 없다. 다시 느린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밥상 앞에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꿈에서 보았던 단청 문양을 생각하는 그의 눈이 빛났다. 장인(匠人)의 혼, 광기(狂氣)가 서린 듯한 눈빛. 열어젖뜨린 창밖으로 어느새 뿌옇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미워도 고와도 내 남편” 임영숙씨의 20여년 사연-

김씨 옆을 지키고 있던 아내 임영숙씨(45). 취재 내내 눈물을 지으며 “20여년 동안 많이 울었는데 주책없이 또 눈물이 왜 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돌렸다. 임씨는 스물 일곱 되던 해에 중매로 만난 김씨와 혼인을 했다.

“그땐 제법 돈도 잘 벌었어요. 직장 탄탄하고 성실하겠다, 착하고 가정적이겠다, 남편감으로 이만한 사람이 없겠다 싶었지요”

앞으로 성실히 꾸려나가기만 하면 남들처럼, 아니 남들보다 더 잘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단다. 김씨가 단청 창작 작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행복한 삶이었다. 소소한 문제로 간간이 말다툼이 있었지만 어느 집안에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작업을 해야겠다. 해야 하는데…” 하며 중얼거리던 김씨는 어느날 느닷없이 직장을 그만두었고, 이후 경제적 부담이 모두 아내에게 돌아오면서부터 임씨의 눈물은 시작됐다. 줄줄이 달린 아이들 교육비에 생활비. 모아둔 돈은 1~2년 사이에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 먹듯’ 했다.

“전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찌그러진 상 하나 달랑 들고 문양만 그려대는 남편을 보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죠. 문양을 전부 태워버릴까 생각도 했어요. 돈되는 거면 문양을 파는 것은 어떠냐고 설득하기도 했더랬습니다. 그때마다 ‘예술품은 함부로 돈 받고 파는것이 아니다’라는 말만 하는 거예요.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대체 어떻게 살라고….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은 지쳐서 이도저도 포기했지만”

‘네 남편이 이상하다’는 사람들의 손가락질, 정말 미친 사람처럼 잠자다 벌떡 일어나 문양을 그리는 행동,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몸이 뒤틀리는 남편. 임씨의 베개에는 눈물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그만 제가 이해해요. 가끔은 ‘사라지는 우리나라 전통문양을 내가 살려야지’ 하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있다니까요. 미워도, 고와도 내 남편인데…”.

임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글 김정선기자 kjs043@kyunghyan/


최종 편집: 2002년 09월 08일 16: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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